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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기도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by 최창국2024-01-26

교회 역사에서 형성된 중요한 경구가 있다. 바로 기도의 법이 곧 믿음의 법이다(lex orandi lex credendi)란 경구다. 이 경구는 5세기의 수도사 아퀴테인의 프로스퍼(Prosper of Aquitaine)가 남긴 말이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믿음과 삶의 방식이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기도는 성경에서도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다. 

  

요한계시록 8:3-5에는 성도의 기도가 세상에 미치는 효과를 묘사하고 있다. 성도의 기도는 천국의 향로와 함께 천사에 의해 하나님의 존전으로 올라간다. 그 후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며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난다”(계 8:5). 이는 기도가 우주에 미치는 생생한 묘사이다. 이처럼 기도는 우주적 영향력이 있는 영적 활동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사랑한 세상(요 3:16)에서 생명력을 지닌다. 기도는 세상을 치유하는 생명력을 지닌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의 생명력을 초월적이고 기적적 능력으로만 보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를 만병통치약처럼 접근하는 것은 기도의 가치와 효과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주의해야 한다. 기도는 단지 기적을 낳는 방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많은 특정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약속을 맺고, 이를 기적적으로 성취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자녀를 낳지 못하는 여인에게 자녀를 약속한 내용이다(창 17:15-19; 18:10-15; 30:22; 삿 13; 삼상 1:20; 눅 1:7). 하지만 이러한 내용들을 이해할 때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적으로 출생한 아이들은 각자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특별한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에, 자녀를 낳지 못하는 현대의 여성들이 이 내용을 자신에게 똑같이 적용하여 기도하면 아이를 허락하신다는 약속으로 간주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기적을 배제해서도 안 되지만,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키거나 기적을 일으키는 데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 마음대로 이용하거나 제도화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삶에서 기도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가 초자연적 기적 추구의 열정으로만 이해되어서도 안 되며, 하나님의 자연법칙을 배제하는 기도 문화를 형성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치유는 초자연적일 수 있지만 창조적 설계, 즉 자연법칙을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할 때 자연법칙에 순응하여 기도하는 법도 알아야 한다. 차가운 겨울에 벼를 심어놓고 눈이 오지 않기를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창조 법칙과 배치되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기도해도 노화 차제를 막거나 먹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아브라함 카이퍼에 따르면, “자연법이라고 하는 용어는 자연으로부터(from Nature) 기원하는 법칙이란 뜻이 아니라 자연 위에(upon Nature) 부과된 법칙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계명은 위로는 궁창에도, 아래로는 대지에도 있으며 이 세계는 이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시편기자가 말한 바와 같이 이 계명들은 하나님의 종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체와 동맥과 정맥을 통하여 흐르는 피와, 호흡기관인 우리의 허파에도 하나님의 계명이 주워져 있다”(아브라함 카이퍼, 칼빈주의, 96). 


우리의 기도가 자연법칙과 충돌해서는 안 된다. 특히 우리의 기도가 모두가 인정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을 무시한다면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 이로써 야기된 재앙은 자연법칙을 무시한 기도에 대한 창조자가 설계한 보편법의 응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신학자들은 이런 재앙을 하나님의 심판이라 부른다”(도로시 세이어즈, 창조자의 정신, 26). 하나님은 우주가 창조 법칙에 따라 작용하도록 설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치유 또는 신유 역사가 일어날 가능성이 더 높은 것도 바로 그 법칙 안에서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법칙과 질서 안에서 더욱 충만해질 때 하나님의 신비를 더 온전히 경험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자연법칙에 순응하여 기도하는 법을 알아야 하지만, 기도의 초자연적 특성을 거부해서도 안 된다. 루돌프 오토는 서구 기독교가 신학과 신앙의 본질을 이성주의 혹은 합리주의, 즉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차원에만 종속시킴으로 기도와 같은 신앙의 생명력을 고갈시켰다고 보았다. 그는 기독교 신학과 신앙은 반이성적이거나 반지성적이어서는 안 되지만, 비이성적일 수 있는 인간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계몽주의 시대사조가 저지른 합리주의적 오류와 독단에 도전을 하였다. 그는 종교 경험의 비이성적 차원을 뉴미너스(numinous)라고 부르고 거룩한 존재 앞에 설 때 자기가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피조물임을 느끼는 의식이라고 하였다 그가 말한 비이성적 종교 체험의 신비감은 하나님이 인간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을 때 경험한다. 그는 종교 경험은 역설, 비약, 실존적 결단, 자기 초월의 감정, 황홀한 감성, 비매개적인 직관, 비인과적 동시성 체험 등을 동반하기 때문에 종교 경험이 반드시 논리적, 과학적, 인과론적 설명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실재의 세계가 아니라고 하였다(Rudolf Otto, The Idea of the Holy, 1-40). 바울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요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을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라고 고백했듯이, 인간의 영적 경험은 이성적이고 감성적 표현 능력을 초월하는 특성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영적 경험은 은혜, 신비, 봉사, 경험 등과도 관계된다. 


루이스는 “종교적 권위가 보다 확고히 수립되면 될수록 우발적 영감에 대해서는 더욱 대적하게 된다”고 하였다(C. S. Lewis, Ecstatic Religion, 34). 그것은 아마 기도의 신비의 미학을 의심의 눈을 가지고 자기도취적 행위나 욕망의 추구로 보고, 기도를 점점 무시하는 것에 대한 예견이었는지도 모른다. 분명히 기도 경험은 자연법칙 안에서만 이해될 수 없는 신비의 미학이 있다. 특히 기도의 신비의 미학은 우리의 영적 삶을 이성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버리는 과오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 기도를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삶과 맞바꾸려는 유혹을 받는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기도를 통한 창조 세계의 샬롬에 대한 성경적 전망은 천상적이지만, 이 땅에서 실현되는 천상적 질서에 대한 전망이다(계 21:1-2). 이는 우리가 기도를 통해 배우는 텔로스(telos), 즉 궁극적인 목적이다. 주의 기도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의 기도는 현실을 도피하는 전망이 아니라 회복하는 전망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파괴하지 않으시고 새롭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의 성경적 전망은 이 땅에서 어떻게 인간답게 살 것인가에 대한 전망이다. 기도의 성경적 전망은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의 이분법을 철저히 거부한다. 앙리 드 뤼박의 말처럼, 우리는 초자연적인 것을 자연적으로 욕망하도록 창조되었으며, 은총이 초자연적으로 작용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창조된 자연적인 목적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Henri de Lubac, The Mystery of Supernatural, 130-137). 따라서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은총도 결국은 자연적인 삶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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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최창국

최창국 교수는 영국 University of Birmingham에서 학위(MA, PhD)를 받았다. 개신대학원대학교 실천신학 교수, 제자들교회 담임목사로 섬겼다. 현재는 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실천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는 『삶의 기술』, 『실천적 목회학』, 『영혼 돌봄을 위한 멘토링』, 『해결중심 크리스천 카운슬링』, 『영성과 상담』, 『기독교 영성신학』, 『기독교 영성』, 『중보기도 특강』, 『영성과 설교』, 『예배와 영성』, 『해석과 분별』, 『설교와 상담』, 『영적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 『영혼 돌봄을 위한 영성과 목회』 등이 있다. 역서는 『기독교교육학 사전』(공역), 『공동체 돌봄과 상담』(공역), 『기독교 영성 연구』(공역)이 있다.